(6.25전쟁) 6.25전쟁은 6.23전쟁이며 남한의 북침..06편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자유게시판

(6.25전쟁) 6.25전쟁은 6.23전쟁이며 남한의 북침..06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산인1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24-03-10 09:10

본문



6편. ‘서울해방작전’과 3일 간의 평온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한국군의 북진공격으로 일어난 소규모 무력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국지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조선인민군의 작전계획은 38도선 이남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6.25전쟁은 국지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북의 공식용어를 빌리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서울해방작전’이다. 만일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이 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 아니라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었다면, 북에서는 그 전쟁을 ‘남조선해방작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194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에서 채택된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라고 명기되었다. 


북이 자기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날은 1972년 12월 27일이다. 그날 최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변경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북의 시각에서 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자기의 수도인 서울이 반란세력에게 점령되어 있었던 것이다.따라서 반란세력이 점령한 수도를 탈환하는 ‘서울해방작전’은 북에게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중대과업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국지전은, 북의 표현을 빌리면, 


“이승만 괴뢰도당이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는” 제한적 해방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연대 지휘관들 중에는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최태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 6월 25일을 전후하여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0년 6월 23일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소속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은 송악산 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천막회의장에 모였다. 


그 회의에서 최태환은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었던 김두봉의 연설을 들었다. 


김두봉은 연설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간부회가 남조선 당국에 평화통일을 여러 차례 제안했건만, 번번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 동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후략)”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한국군은 ‘서울해방작전’을 준비한 조선인민군을 옹진지구에서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서울해방작전’이 시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개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지휘관들은 서울 이남 지역이 표시되지 않고, 경기도 평택까지만 표시된 5만 분의 1 축적의 군사지도를 가지고 전투를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민군 제6사단 사단장이었던 방호산은 조선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한국군과 맞닥뜨리면 교전은 하되 결전은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38도선 이남 전역을 ‘해방’하는 전면전이 아니라서울을 ‘해방’하는 국지전이었기에 그처럼 특이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개성을 ‘해방’하고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에 붙잡은 한국군 포로들에게 ‘서울해방작전’의 정치군사적 의의를 해설하고 즉각 풀어주었는데,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 몇 사람은 즉석에서 조선인민군 전투대오에 합류했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1950년 6월 27일 오후 5시경 서울 북쪽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현재 서울 성북구 미아동) 인근까지 진출했고, 한국군은 미아리고개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울방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아리 인근까지 진출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로동신문> 2016년 6월 28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1950년 6월 27일 밤에 서울 시내로 진격하지 않은 까닭은, 서울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서울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6월 25(28)일 오전 5시에 공격을 하되 포사격은 하지 말고 ‘서울해방전투’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어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6월 28일 오전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서울해방작전'에서 승리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던 때,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 소속 T-34 전차가 서울시내를 지나는 장면이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땅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날 오전 5시 '서울해방작전'에 돌입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국군이 구축한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해방'했다. 


조선인민군 제107련대 제1대대장 김영 소좌가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게양했다.류경수 려단장이 지휘한 조선인민군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오산전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은 미국군을 격파하고, '대전해방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했다. 


제105땅크려단은 1950년 7월

27일 근위 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5월 23일 사단명칭을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땅크 사단으로 바꿨다. 


정전 이후 긴 세월이 흘렀건만, 북에서는 6.25전쟁 시기 땅크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류경수 려단장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류경수 려단장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한 항일혁명투사였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중지했다.‘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었으므로, 공격을 중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태환은 자기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때부터 우리들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가운데 대기상태로 돌입했다. 대기상태란 김포전투가 사실상 끝난 6월 30일에서 7월 2일까지 주둔지에서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 정비, 정찰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현재 새마을본부 자리 근방(서울 종로구 삼청동-옮긴이)이었다.”



‘서울해방작전’이 완료되자 되찾은 서울의 평온은 너무 짧았다.1950년 6월 29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작전명령을 받은 주일미공군기지의 B-29 폭격기들은 6월 29일 오후부터 한반도 상공으로 건너와 조선인민군 주둔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반도 공습은 코리언들끼리 싸운 국지전에 외국군대가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성격을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바꿔놓은 중대사건이었다.


오늘의 군사분계선과 마찬가지로, 당시 38도선도 두 개의 나라를 갈라놓은 국경선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 안에 그어진 군사경계선이었으므로, 미국의 무력개입이 시작되기 전 6.25전쟁 초기의 국지적 내전에는 침략이나 침공이라는 개념이 사용될 수 없으며,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과 남측의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북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궤변을 70년 동안 붙들고 있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전혀 다른 상황은, 미국이 조선인민군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자, 1950년 7월 1일부터 국지적 내전에 불법개입한 ‘미제침략군’을 상대로 조선인민군이 반침략전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태환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8일 국지적 내전에서 승리하고 종로구 삼청동에 주둔한, 자신이 배속된 조선인민군 제6사단 보병부대에게 한강 남쪽에 있는 영등포와 인천을 ‘해방’하는 전투를 재개하라는 새로운 작전명령이 하달된 때는 7월 3일 새벽이었다.

 

 

      07편에서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회사명 : CODE404 / 대표 : 이승원
주소 :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 138-30, 9층
사업자 등록번호 : 456-03-01654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제2020의정부호원0046호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이지혜

공지사항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050
어제
3,157
최대
3,749
전체
1,057,869
Copyright © PONO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