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산을 선택할 때 지리산과 함께 1,2위를 다투는 설악산. 제 개인적으로는 지리산을 제치고 단연
국내 최고의 명산으로 꼽는 설악산이지만, 설악은 그런 저의 애정을 몰라주고 먼 곳에서 어렵사리 설악을 찾을 때마다
곱게 맞이하고 곱게 보내주는 경우가 없이 심술부리는 경우가 많아 아쉬운 산이기도 합니다.
- 설악동에서 올라 천불동계곡을 지나 대청봉까지 기진맥진 올랐다 오색까지 기다시피 내려오며
식수가 떨어져 흙탕물까지 퍼먹었던 학창 시절의 오래된 추억.
- 그 유명한 공룡능선을 찾고자 이른 새벽 오색에서 대청봉에 올랐으나 엄청난 비바람에 공룡능선을 포기,
천불동으로 하산하다 계곡에 디카 퐁당 빠트렸던... 피눈물 났던 기억.
- 이른 새벽 한계령에서 올라 대청봉 올랐다 하산길에 운무에 갇혀 길을 잃고 조난당해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자정 넘어 겨우 탈출했던 가슴 철렁했던 기억.
- 공룡능선 재재재도전에서 최악의 도화지뷰에 좌절했던 기억.
- 그때까지의 수차례 아쉬움을 한방에 해결해 준 2018년 화창했던 어느 봄날의 기억. 하지만 역시나 설악은 곱게
보내주질 않고 하산길에 뜬금없는 아킬레스건 통증이 찾아와 하산길 내내 고생했던 기억 등등등...
이렇게 아무 탈없이 무난하게 다녀온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고난의 연속이었던 설악산 산행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청산장이 없어진다는 소식에 중청산장의 추억을 만들고자 예정 없던 산행을 결심, 어렵사리 중청산장 한자리를
예약, 산행일이 점차 다가옴에도 여느 때의 설렘보다는 또 어떤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더 컸던
설악산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려는... 기어코 현실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중청산장에서 하룻밤 보낸다곤하지만 텐트 하나 제외한 거 빼고는 박배낭과 별반 차이가 없는 구성입니다. 여기에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행동식, 그리고 스틱을 추가하니 배낭무게가 거의 18㎏에 육박합니다. 결정적으로 배낭무게를 늘린 주범은
카메라, 그리고 식수였네요. 간만에 명산에 간다고 욕심을 부려 Dslr 2대에다 렌즈 3개 바리바리 챙기고 삼각대까지 포함하니
카메라 관련 물품만 5㎏ 가까이 되고, 거기에 식수 4리터..
결론적으로 Dslr 1대, 렌즈 1, 삼각대, 생수 2리터 제외했어야 했습니다. 무거워 디지는 줄.....
이번 산행이 고난의 행군이 된 건 저질체력도 저질체력이지만 무거운 배낭무게도 주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1월에 학가산 다녀온 후에 줄곧 산행을 하지 않은 데다 연초에 비해 6㎏나 불어난 몸땡이로 인해 저질체력이 되었음에도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는지 산행 전 다양한 코스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1안. 한계령 ~ 한계령갈림길 ~ 귀떼기청봉 ~ 한계령 갈림길 ~ 서북능선 ~ 대청봉 ~ 중청산장 ~ 공룡능선 ~ 설악동
1안은 미답지인 귀때기청봉을 들렀다 중청산장으로 향하는 코스, 그리고 공룡능선 도화지뷰 극복기를 찍는 안입니다.
2안. 장수대 ~ 서북능선 ~ 귀떼기청봉 ~ 대청봉 ~ 공룡능선 ~ 설악동.
기왕 귀떼기청봉 갈 생각이면 대승폭포도 볼 겸 아예 서북능선 종주에 도전하는 안...
미쳤구나.. 이 안대로 갔으면 한계령으로 내려왔거나 서북능선 어드메쯤에서 귀신 되었을 듯..
3안 설악동 ~ 공룡능선 ~ 희운각 ~ 대청봉 ~ 천불동계곡 ~ 설악동
저질체력을 감안하지 않고 미쳐도 단단히 미친 코스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3안은 그나마 현실적이긴 하네요.
암튼 그랬습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설악에 처맞기 전까진.......
새벽 3시에 기상,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3시 40분 집을 나섭니다.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시나브로 날이 밝아오고, 볼일을 보기 위해 내린천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갑니다.
여느 때 같으면 산에 갈 생각이 싹 달아나는 일기예보였지만 중청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내키지 않는 날씨임에도 산행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악동 B지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설악동 입구 주차장은 유료로 이틀 동안 12,000냥의 주차비를 지불해야 한다기에
설악동에서 2.5㎞ 아래에 위치한 무료주차장인 B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었습니다. 이른 시각이기도 하지만 아직 단풍철이
아닌 탓인지 넓은 주차장이 텅 비어있네요.

B지구 주차장을 차를 세워두고, 여러 날 고민 끝에 결정 내린 들머리인 한계령을 향한 여정에 나섭니다.
일단 길을 건너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소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향합니다.

설악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 옆에 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설악동에서 8시 11분에 출발하는 속초행 7 or 7-1번 버스를 기다립니다.
이틀 내내 어깨를 짓눌렀던 너무나 무거웠던 배낭. 매번 25리터 배낭만 가볍게 메고 다녔는데, 십수 년 만에 꺼낸 40리터 배낭이
꽉 찬 내용물로 인해 터질 듯 빵빵합니다. 75리터 배낭은 좀 너무 큰 것 같아서 이걸로 가져왔는데.. 간만에 매서 그런지 무거운 건
둘째치고 너무나 불편하기만 했었네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무겁기만 한 쇳덩어리 삼각대. 저건 정말로 뺐어야 했는데..
산행 내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었기에 굳이 저 무거운 걸 챙겨간 게 더욱더 후회가 되네요.

15분 만에 도착한 속초해맞이공원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합니다. 여기에서 길을 건너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한계령행 버스표를
구매하고 편의점 앞에서 09시 조금 지난 시각에 한계령행 버스에 탑승합니다.
좋지 않은 일기예보로 마음은 무겁지만 간만에 본 바다는 언제나 반갑습니다.

한계령행 버스시간이 좀 남아있어 가볍게 속초해맞이공원을 둘러봅니다.

요즘 핫한 동네 '양양' 터미널 가는 길..

오색을 지나고..

남설악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흘림골 입구를 지나...

한계령에 도착합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17년 만에 다시 찾은 한계령이네요.

한계령 고갯마루에서 바라본 남설악

한계령 휴게소 내부엔 처음 들어가 봅니다. 전에 왔을 땐 산에 올라가기 바빠서..

처음부터 꽤 긴 계단길이 이어집니다.
2004년 백두대간 종주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랐던 이 길을 19년 만에 다시 오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설악루에서 잠시 사진으로 찍고 있으려니 우려했던 상황... 정말 산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다들 배낭커버를 씌우거나 판초우의등으로 대비를 하고 계시는데 저는 배낭커버가 없어 우의를 꺼낼까 하다가
많이 내릴 것 같지 않아 그냥 진행하기로 합니다.

위령비를 지나 초소옆 철문을 통과하며 설악의 품에 안깁니다. 너무 감격해서 손이 떨렸는지 사진이 꽤 흔들렸네요.

풍경을 찍을 게 없으니 가을야생화를 담으며 여유롭게 진행합니다. 이 여유로움이 몇 시간 뒤 당황스러움으로 돌아올 줄이야...
암튼 설악에서 처음 만난 야생화는 '바위떡풀'이었습니다.

보라보라한 '용담'도 산행 내내 볼 수 있었습니다.

뒤에서 등산객들이 올라오면 바로바로 양보해 드립니다. 제 느린 발걸음이 그분들 산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이죠.
한계령삼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거의 1개 소대 정도의 인원을 양보해 드리고... 제가 추월한 분들은 노년의 등산객 두 분뿐.

한국특산종 '금강초롱'도 비록 개체 수는 많지 않았지만 산행 내내 함께했습니다..

금강초롱, 용담과 함께 이번 산행 내내 등로 주변을 보라보라하게 만든 '투구꽃'.
투구꽃이 이번 설악산행에서 제일 많이 본 야생화 개체였습니다.

1307봉 정상에 이를 무렵 '후드득~' 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우의를 꺼내 입는
짧은 순간에 이미 배낭이 축축하게 젖어버리니..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이 더 무거워진 듯한 느낌적이 느낌이 듭니다.
비를 맞으며 진행하기엔 좀 그래서 나무밑에서 한동안 비를 피하다 좀 잦아드는 것 같아 우의를 다시 집어넣고 이슬비를 맞으며
산행을 이어갑니다. 1307봉 정상에 올라가면 꽤 괜찮은 조망을 할 수 있는데 비도 오고 운무도 끼고 몸도 힘들고 하니 정상에
올라가고픈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1307봉에서 내려가는 길에 약간 조망이 트인 곳이 있어 서북능선을 담아보았습니다.
잠시 후 알게 되지만 사진에 나온 서북능선길은 대단히 험난한 등로가 이어지는 능선길이었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배낭은 만근억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짐하며 한걸음한걸음 발을 내딛지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좌측 고관절에서 이상신호가 옵니다. 고관절이 골반뼈에서 빠지는듯한 느낌인데.. 십수 년 전 산행하다
미끄러져 발목골절상을 당할 때부터 우측 고관절 부위에서 간간히 이상신호가 오긴 했는데 하필이면 설악에서 멀쩡하던 좌측
고관절에 이상신호가 오니 참으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올라갈 정도는 되어 이상신호를 무시하고 느리지만
꾸준히 산행을 이어갑니다.
지나온 1307봉.

한계령 삼거리를 향한 마지막 오름짓..

이 나무 여전히 잘 있네요. 예전 사진과 비교해 보니 상단부는 고사해 버렸군요. 암튼 간만에 조망이 트여 자세히 살펴보는데...
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방태산 능선 정도만이 어렴풋이 식별가능하고.. 그 뒤로는 뭐...허...
그런데... 다음날엔 저 가까운 방태산 조차 볼 수 없을 줄이야..... -_-;;;;

오랜만의 산행, 불어난 몸뚱아리, 과한 욕심이 부른 과한 배낭무게,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온 고관절 이상증세...
4가지 악재 속에 이미 다리가 후들거리는 상태가 되어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한계령에서 무려 3시간이나 걸렸네요.
예전 기록 찾아보니 그때는 2시간 30분 걸렸구요. 그런데 그때는 같이 가던 분이 힘들어해서 꽤 자주 휴식을 취하며
꽤나 여유롭게 진행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올랐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긴 휴식을 취한 후에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있는 내설악 풍경을 담아보았습니다.
이 정도 조망이 이번 이틀간의 산행에서 볼 수 있었던 최선의 조망이었습니다.
이 시각 이후, 다음날까지... 조망은 한마디로 '꽝~'

20여분 가까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중청산장을 향해 출발합니다. 예전 그 주목 여전히 거기 서서 길손을 반겨주고 있었고..

전망대에서 바라본 내설악, 그리고 중청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이런 인위적인 계단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몸이 힘들고 험로가 이어지니 이런 정비된 길이 나타나면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후 중청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인위적인 구조물은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트랭글 앱을 켜놓고 다니니 주기적으로 이동거리, 이동속도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동속도가 굼벵이 수준입니다.
줄곧 시속 0.8㎞ 수준입니다. 이런 능선길은 시속 2.5㎞, 암만 느려도 2㎞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데..
느려도 너무 느린 진행속도입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19시까지 중청산장에 도착해야 하는데(그 이후엔 자동취소)
이 속도대로 가면 19시는커녕 21시에도 도착할까말까한 속도이기 때문입니다.

바위능선길이라 조망처는 연이어 등장합니다. 힘들지만 카메라 꺼내 들고 풍경을 담는데 서쪽에서 다가오는 먹구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후 4~5시 소나기 예보가 있긴 했는데 정확한 일기예보가 반갑지 않을 때도 있다니... (원본 클릭)
사실 출발 전엔 오후 4시 정도면 이미 중청산장에 도착해 있을 거란 망상을 하고 있었기에 비소식에 개의치 않았더랬습니다. -_-;
아래쪽으로 오래전 조난사고가 있었던 석고덩골이 내려다보입니다.
1993년,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은 3월 초, 오색에서 대청 찍고 끝청에서 다시 오색으로
내려가려던(당시엔 출입금지구역이 아니었던 듯) 등산객 4명이 끝청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을 놓치고
서북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길을 잃고 탈진, 그중 등산경력이 많은 여성 한분이 한계령으로 가 구조대를 부르겠다며
일행을 남겨두고 홀로 내려갔다가 탈진 후 동사, 그리고 또 한분이 돌아오지 않는 여성을 찾아 뒤따라 내려갔다가
석고덩골 상단부에서 동사한 채 발견되었던 일이 있었지요. 남아있던 일행 두분도 역시 동사한채 발견된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석고덩골을 내려다보며 문득 이 조난사고가 생각났던 건...
'설마 나 조난신고해야 할 상황이 오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슬슬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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